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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새롭게 재조명되는 비운의 군주 광해군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지 않다. 시대의 상황,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사고에 따라 역사적 패자가 그 멍에를 벗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이어지는 암흑기에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도 당시에는 폭군으로 역사 기록에 남았지만, 현대에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더불어 조선의 왕 중 시호를 받지 못한 2명 중 한 명이다. 두 명 모두 통치 도중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물어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반정세력에 의해 철저히 격하됐고 왕으로서 역사에 남지 못 했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서에서 이들은 부정적인 면이 크게 부각됐다. 물론, 연산군은 그의 폭정이 그것을 불러왔지만, 광해군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최근 경향은 특히, 그의 외교정책에 대해 재 평가되는 분위기다. 그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었고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백성의 삶이 더 힘들어졌다. 그 전쟁의 패전으로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던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 항복의 의식을 행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 대목에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광해군은 철저한 실리 외교로 신흥 강국 청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하던 명나라 사이를 오가며 전쟁을 피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국가 시스템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또 다른 전란은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인지했다.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명에서 구원병을 요청했을 때도 최대한 파병을 미루며 버텼다. 조정 대신들의 성화에 출병을 했지만, 은밀히 파병군 사령관을 불러 청나라와 명나라의 힘을 견주어 병력 운영을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파병군 사령관이었던 강홍립은 청나라 군과 첫 대결 후 청나라에 모든 병력을 이끌고 항복했다.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을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강홍립은 이후 조선과 청나라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고 조선은 청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사대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광해군은 집권 당시 북인 세력을 중용했는데 북인 세력은 기존 동인에서 분리된 세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했고 실사구시의 사상을 지난 합리적 사고를 지녔다. 훗날 이들은 실학 사상의 뿌리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다수파 정권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타 정파를 철저히 배격하는 배타성을 보였고 일당 독재라는 무리수를 두었다. 당연히 다수의 정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북인 정권의 실천적 사고는 큰 도움이 됐다. 다수가 반대한 광해군의 외교정책도 이들이 뒷받침해주었다.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좋은 호흡으로 전후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세자 때부터 정치적으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자신이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 출신이었던 선조는 자신의 태생에 대한 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권력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누구도 왕권에 도전하길 원치 않았다. 당시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극심한 당쟁에 빠져들게 된 것 역시 선조가 조장한 측면이 강했다. 


선조는 신권이 하나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고 그들을 분열시켜 힘을 분산시켰다. 그때그때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유도했고 정권을 순간순간 몰아주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이에 더해 선조는 적장자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후궁이 아닌 중전을 통해 얻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세자 책봉을 미뤘다. 하지만 중전 사이에 아들은 없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에서 난 아들이었다. 군왕의 자질은 충분했지만, 선조의 의중은 서자인 그에게 있지 않았다. 광해군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점차 선조의 눈에 들었다. 광해군에 대한 조정의 여론도 점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광해군의 세작 책봉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였지만, 선조는 적장자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임진왜란은 나라의 큰 위기였지만, 광해군이 확실한 후계자가 되는 계기가 됐다. 파죽 지세로 도성을 향해 진격해오는 왜군에 선조는 북쪽으로 몽진을 선택했다. 나라의 위기에 더는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었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전시 상황에 그 책봉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광해군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 







광해군은 전란의 와중에 명나라의 지원에만 기대려 했던 선조를 대신해 의병을 모으고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은 일반 대중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의 위기관리 능력을 영의정이었던 류성룡과 조화를 이루며 국난 극복에 큰 힘이 됐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그의 입지는 다시 흔들렸다. 


차기 왕권을 보장받는데 필수적인 명나라의 승인이 계속 지연됐다. 명나라 내부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지만, 이는 가뜩이나 후궁 소생으로 흔들리는 그의 정통성을 더 흔드는 일이었다. 선조 역시 이런 광해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먼저 승하한 중전을 대신해 들어온 중전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선도가 그토록 바라던 적장자였다. 


이후 선조는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경시했다. 조정에서도 세자 교체에 대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세자로서 오랜 기간 쌓아온 정치적 기반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광해군은 밖으로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해야 했고 안으로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광해군은 무너진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호패법은 시행했고 의서를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편찬토록 하는 등 서적 간행에도 힘썼다. 대동법을 시행함으로써 공납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 밖에도 전후 복구를 위해 노력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의 미약한 정치적 기반은 그를 흔드는 반대파들과의 대립을 이겨내야 하는 어려움을 주었다. 권력 강화를 위해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불가피했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로 정적의 관계였던 어린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이는 훗날 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된 폐륜 행위였다. 하지만 정적을 제거하지 못하면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권력의 속성상 이해불가의 행동은 아니었다. 상당수 조선의 왕들이 형제, 친. 인척과의 권력 다툼을 겪었고 패배자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것을 비추어 보면 영창대군에 대한 광해군의 조치는 무조건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렇게 힘겹게 지킨 왕위였고 나름 성과도 있었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뜻을 완전히 펼치지 못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무리한 공사로 민심을 잃었고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 했다. 인력풀이 한정돼 있었고 측근들에 의존해 정치를 해야 했다. 여기에 그의 해안마저 흐려지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는 그에 대한 반정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결국, 서인이 중심이 된 반정세력을 1623년 거사를 도모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인조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광해군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광해군은 이후 긴 유배생활을 거친 후 1641년 그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 이후 정권을 중심세력이 된 서인은 성리학적 사고에 입각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외교 정책을 펼쳤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했다. 


이는 청나라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그 전란을 불러오면서 민생을 더 파탄의 지경으로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됐다. 만약 광해군이 추구하던 중립 외교정책을 지속했다면 전후 조선은 새로운 나라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할지도 몰랐다는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다. 그의 실정보다 그의 실각 이후 외교 정책 실패로 인한 조선이 타격이 너무 컸기 대문이었다. 


광해군은 역사서에 실패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그리고 이후에도 광해군은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광해군은 다른 시각으로 인식되고 있다. 국가 이익에 따라 어제의 적이 아군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국제 정세거 이어지는 상황에서 그의 외교적 수완은 지금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폭군의 이미지만 덧칠할 수 없는 이유다. 어쩌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에서 긍정으로 더 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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