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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임진왜란 1592, 4회] 한.중.일 3국의 전쟁터가 된 비운의 조선






지난 1, 2, 3회를 통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함께하는 팩츄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임진왜란을 조명했던 드라마 임진왜란 1592, 그 네 번째 이야기는 명나라의 참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전쟁 전 명나라를 비롯한 조선, 일본의 상황과 전쟁 후 명나라의 참전 과정, 명나라군이 참여했던 대표적 전투인 평양성 전투가 주 내용이었다. 그 속에서 명나라의 참전 배경과 한.중.일의 역학관계가 함께 조명됐다. 

임진왜란 발발의 주요 원인은 알려진 대로 일본을 통일한 실력자 토요토미의 야욕이었다.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의 실력자들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힘으로 누를 수 없었던 상황에서 토요토미는 일본을 벗어나 외부로 눈을 돌렸다. 도요토미는 집권 이후 줄곳 명나라 침략을 준비했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대한 침략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의 명나라 즉 대륙 진출을 위한 대규모 도발이었다. 이를 위해 도요토미는 서양과의 교류 과정에서 얻은 조총을 주력 무기로 개발했고 나라의 역량을 전쟁준비에 쏟아부었다. 준비는 철저했고 일본은 무려 20만 대군을 앞세워 전면전을 감행했다. 

이렇게 일본이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명나라와 조선은 이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었다. 명나라는 일본을 작은 섬나라 정도로 여기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나라는 일본 왜구의 노략질에는 우려감을 보였지만, 전면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왜구들에 잡혀 일본에 머물던 명나라인의 첩보가 있었지만, 이를 믿지 않았고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는 혼선을 불러왔다. 이는 임진왜란 개전 초기 명나라의 파병이 늦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명나라의 대응 이면에는 국정 시스템이 원할하게 운영되지 못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명나라는 전성기를 지나 점점 나라가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국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중요 정책 결정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변방의 반란은 명나라의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대규모 전쟁에 대한 대응이 쉽지 않은 명나라였다. 

조선 역시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100년 넘게 이어진 평화 시기는 조선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 시간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가 거의 전무했다. 도요토미의 존재와 그에 의한 전쟁준비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조선 역시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미개한 섬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뒤늦게 그들의 위협을 느끼고 사신을 파견하긴 했지만, 동.서인으로 대표되는 붕당간의 대립속에 이를 정확한 상황판단의 기회로 삼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과 명나라가 전쟁대비를 머뭇거리는 사이 일본은 순조롭게 전쟁을 준비했고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시작과 동시에 일본은 속도전을 전개했다. 일본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파죽시세로 조선의 도성 한양을 점령했고 북으로 진격했다. 얼마 되지 않아 평양성마저 손에 넣은 일본은 조선의 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고 명나라로 진격을 현실로 만들기 직전에 이르렀다. 

이런 일본의 기세는 그들을 과소평가했던 명나라에 큰 충격이었다. 명나라는 뒤늦게 참전을 결정했지만, 아직 내부 반란을 평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군대를 일으키기 어려웠다. 명나라는 일본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이는 일본군의 선봉을 이끌던 고니시의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개전초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급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바닷길이 막혔고 육지에서는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됐다. 일본군은 특히, 부족한 군량확보를 위해 조선의 곡창지대 호남 공략에도 나섰지만, 그 관문인 진주성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조선 북쪽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는 협상을 통해 그들의 필요한 것을 얻어내려했다. 이는 명나라 협상을 주도한 심유경의 이해관계와 일치했다. 밀실 협상과정에서 이들은 조선의 남쪽 지방을 일본에 할당하는 할지 안을 깊이있개 논의했다. 이는 조선은 물론, 명나라 주류의 의견과는 배치는 내용이었다. 결국,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 과정을 통해 명나라는 전쟁준비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드디어 내부의 반란을 평정한 명나라는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는 제후국인 조선의 위기를 구원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자칫 자신들의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숨은 의도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은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명나라 망명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명나라로서는 이를 받아들 경우 일본군의 중국 본토 침략을 피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했다. 즉, 전쟁을 하더라도 자국 피해를 줄여야 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지만, 명나라의 참전은 육전의 양상을 크게 바뀌 놓았다. 명나라군은 일본군의 주무기 조총보다 사거리나 위력이 훨씬 강한 화포부대가 함께했다. 명나라는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을 밀어붙였다. 이미 요동의 선발대가 일본군에 참패한 경험이 있었던 만큼 치밀한 작전과 전술로 일본군을 상대했다. 조선은 류성룡을 중심으로 명나라 군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평양성 전투는 3국의 화력 무기가 모두 동원된 전투였고 당시로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었던 현대전 양상의 접전이었다.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니시의 일본군은 강하게 저항했지만, 화력을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했다. 조선으로서는 육상 전면에서는 최초 승리였다. 

평양성의 패전으로 일본군의 기새는 크게 꺽였다. 일본군은 속속 한양으로 집결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는 부족한 보급에 따른 군량확보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이는 일본군의 전략이 공세에서 방어로 변화한것을 의미했다. 속전속결이라는 중요한 전략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보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장기전은 일본군에 절대 유리하지 않았다. 조선으로서는 전세를 역전시킬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평양성 전투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명나라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이후 전투에 소극적이 됐다. 대승 이후 방심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문제는 명나라 군이 전투에 소극적이 되면서 하루 라로 빨리 침략군을 영토밖으로 밀어내려했던 조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점이었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배제한 채 본격적인 강화협상을 시작했고 조선이 원치 않았던 휴전상태가 길게 이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 조선의 영토는 한.중. 일 3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더 황폐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명나라의 참전은 큰 의미가 있었다. 비록 그들이 참전이 길어짐녀서 조선에 큰 부담이 되고 오히려 악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전쟁 초기 밀리기만 했던 조선이 다시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분명했다. 이후 조선은 전쟁대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이후 일본의 재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이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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