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었다. 창업 군주는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공신을 우대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공신 세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결국, 피의 숙청은 불가피했다. 그 과정을 거쳐 왕권이 권력기반이 다져진 왕조는 수백 년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과거 신라 말, 그리고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통일 왕조를 연 고려도 다르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를 무너뜨린데 이어 신라, 후백제를 차례로 병합하고 고려를 세웠다. 우리 역사상 마지막 통일 왕조였다. 왕건은 과거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했고 통일 신라 이후 버려졌던 대동강 이북 땅에 대해 지배권을 강화했다.
한 편으로 포용 정책을 통해 멸망한 북쪽의 발해 세력과 신라와 후백제 잔존 세력과의 화합을 도모했다. 이는 지금의 개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호족이었던 왕건으로서는 지방의 모든 세력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왕건은 혼인 정책으로 지방 세력을 회유했다. 결국. 수십 명의 후궁이 생겨나고 말았다. 왕족의 숫자가 크게 생겼다는 것은 그의 사후 치열한 권력 투쟁을 예고했다.
왕건은 그가 죽기 전 나라 운영의 원칙을 천명했지만, 그의 사후 고려는 치열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과 그의 동생 왕식렴으로 대표하는 왕족 세력, 왕의 후궁을 궁궐에 들여보낸 신라, 후백제계 호족 세력들까지 모두 권력의 최상위층을 노렸다.
왕건 이후 왕들의 입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왕은 모두 불안감 속에 왕의 자리를 유지했고 모두 단명하는 비운을 겪었다. 왕권의 약화는 불가피했고 권력 투쟁을 제어할 컨트롤 타워가 없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고려 제4대 왕으로 왕위를 이은 광종은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이었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힘으로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광종은 법과 제도의 정비는 단행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신원시키는 노비안검법과 공평한 관리 등용의 문을 연 과거제도가 대표적이었다. 여기에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관복을 개편해 시행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들과 공신들의 중요한 자산을 빼앗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비는 중요한 노동력이기도 했고 사실상 그들의 사병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효과를 거뒀다. 이와 더불어 다양한 인재를 기용할 수 있는 과거제도는 소소의 권력자들이 독점한 관직을 나눠 그들의 정치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과거를 통해 기용된 관료들은 왕권을 뒷받친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 외에 자신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제멋대로였던 관복을 일정하게 통일하면서 왕보다 화려한 관복을 금지하면서 왕과 신하의 구분을 엄격히 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도 신권을 약화됐고 고려는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국가로의 토대를 다질 수 있었다. 광종은 사실상 고려를 새롭게 연 왕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 강화 정책은 앞서 언급했듯이 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광종은 이에 대해 피의 숙청으로 맞섰다. 광종은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대해 예외 없이 칼을 빼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훗날 역사가들이 이런 그의 숙청작업에 대해 광기 어린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그의 공포정치는 집권 말기까지 계속됐다. 이런 후유증에도 광종이 바라던 대로 왕권은 강화됐다.
이를 바탕으로 광종은 중국 왕조와 대등한 관계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자주 국가로서 고려를 천명하기도 했다.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왕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광종은 자신감을 드러낸 조치였다. 이렇게 고려 왕조에 있어 큰 획을 그은 광종이었지만,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훗날 유학자들에게 광종의 공포정치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 했다. 물론, 폭력적인 권력 강화는 오늘날에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과정이 좋지 못하다면 정당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위태로운 왕권과 나라의 존립 기반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 광종의 선택은 불가피한 부분도 있었다. 지금처럼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권력을 손에 쥘 주인공을 결정할 수 없는 시절에 광종은 조치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보다 근대적인 재도가 정착된 순기능도 있었다. 고려 광종의 치세는 고려 왕조를 수백년동안 이어가게 한 수성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이 보인다.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도 한 가지 정답으로 특정지어지긴 힘들어 보인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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